우리나라가 지난 10월에도 92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지난달에 대한민국이 외국과의 거래에서 92억 달러를 벌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무려 80개월 연속 흑자입니다.
** 참고로 수출한 돈이 수입한 돈보다 많은 것을 무역수지 흑자라고 하고 거기에 관광수지(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들어오면 흑자), 본원소득수지(외국인이 배당 많이 받아가면 적자) 이전소득수지(외국인 근로자가 자국으로 송금하는 돈이 많으면 적자) 등을 더해서 계산한 것을 경상수지라고 합니다.
이 소식이 중요한 이유
경상수지 흑자는 일반적으로 좋은 뉴스로 해석됩니다. “쓴 돈보다 번 돈이 더 많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나 경상수지 흑자는 늘 좋은 소식은 아닙니다. 소득분배가 잘 안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다른 나라 국민들 행복하게 하는데 우리 국민들이 희생하고 있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경상수지 흑자는 우리가 불행하다는 증거일 수도
예를 들어 유럽 축구리그에서 뛰는 한국인 선수 A의 연봉이 100억원이라고 가정해보죠. 가족들은 한국에 있습니다. A선수는 유럽에서 혼자 9억원을 썼고 한국의 A선수 가족은 1억원을 썼습니다. 그래서 A선수의 가정은 올해 90억원의 가계부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이런 소식은 A선수의 가족에게 반가운 소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선수는 100억원을 벌었고 아낌없이 넉넉히 썼지만 9억원밖에 못썼지요. 왜 그랬을까요. A선수의 소비욕구를 자극할만한 상품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즐기려고 버는 건데 버는 만큼 즐기지 못하는 불균형이 ‘흑자’라는 숫자로 나타납니다.
A선수 가족은 왜 1억원밖에 못썼을까요. (또는 안썼을까요) A선수가 가족들에게 1억원만 송금해줬기 때문입니다. A선수가 연봉 100억원을 버는 축구기술을 갖게 되는 과정에서 별 기여가 없는 가족들은 1억원도 고마워해야 할 돈일 수도 있습니다만, 만약 A선수가 가족들 모두에게 10억원씩 나눠줬다면 A선수 가정의 가계부 흑자는 훨씬 줄어들고 가족들은 더 행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A선수의 가족들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이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A선수가 그냥 연봉 10억원만 받고 국내리그에서 뛰었다면 가족들이 매일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살 수 있었을텐데, A선수는 가족들은 희생시키고 아무 혈연관계도 없는 유럽 축구팬들만 즐겁게 해주면서 별로 쓸모도 없는 돈 90억원을 받은 셈입니다.
우리나라가 지난해 기록한 92억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도 비슷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자동차나 반도체, K팝, 드라마가 우리나라에서 소비되지 못하고 남아서 외국으로 팔려나가는데 , 그렇게 벌어들인 달러로 우리나라 국민들이 필요한 이런 저런 외국산 상품들을 수입하고도 92억달러가 남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 92억달러가 어디로 사라지는 게 아니므로 저축했다가 나중에 쓰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2018년에 사망한 수십만명의 한국인들에게는 ‘나중’이란 존재하지 않는 시간 입니다. 일은 열심히 하고 돈은 벌었는데 그만큼 못쓰고 사망한 것입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를 생산하지 않았다면, 외국인들이 삼성전자의 반도체와 휴대폰에 그렇게 열광하지 않았다면, 삼성전자는 그 돈과 직원과 설비로 제주도나 설악산에 놀이공원을 하나 더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국민들은 거기에서 더 즐겁게 여가를 보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 경우 92억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는 없었겠지만 ‘적게 벌어서 쓸만큼 쓰고 난 후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는 상황’은 ‘많이 벌어서 쓸만큼 쓰고 난 후에도 92억 달러나 남은 상황’에 비해 더 나쁜 상황은 아닙니다. (축구선수 A의 가족들을 생각해보시죠)
삼성전자가 직원들 또는 하청업체들에게 수천억원의 돈을 더 나눠줬다면(그 행위가 합리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긴 합니다만) 그 직원들이나 하청업체 직원들이 더 늘어난 소득으로 미국산 아이패드나 나이키 운동화를 구매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수입액이 늘어나서 경상수지 흑자는 줄어들었겠지요.
경상수지 흑자가 많다는 건 이처럼 벌어들인 돈이 국내에서 충분히 배분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분배가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역시 축구선수 A의 가족들을 생각해보세요. 축구 기술에 기여도 못했는데 아빠가 번돈을 모두 가져가는 게 꼭 ‘옳은 것은’ 아니죠. 수출기업의 현금 보유고를 무조건 털어서 나눠줘도 안되는 이유와 마찬가지 입니다.)
열심히 벌었으나 우리가 쓰지 못한(또는 쓰지 않은) 그 92억 달러의 흑자는 결국 외국의 서비스나 제품이 아닌 외국의 채권이나 주식을 사는데 투입됩니다. 92억달러를 그냥 현금으로 국민들 안방에 놓아둘 수는 없으니까요. 요즘 해외 주식 투자가 열풍인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 92억 달러는 우리에게 주식이나 채권을 판매한 외국인들에게 들어가서 그 외국인들이 뭔가 구매하고 싶은 것을 구매하는데 사용됩니다. 이 역시 ‘남만 좋은 일’입니다.
결론
어쨌든 그렇게라도 돈(달러)을 모아놔야 혹시 위험한 상황(예를 들면 외환위기같은)에 빠져도 생존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외환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는 미래의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일이겠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의미없는 일입니다.
그럼 경상수지 적자가 좋은 건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벌어들인 달러를 쓰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더 빌려와서 쓴다는 말은 그만큼 경제활동이 활발하다는 의미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채가 늘어나면 어느 순간 부채를 더 늘리지 못하는 순간이 오고 그러면 채권자들은 부채 상환을 요구하고 국가부도로 이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경상수지 적자는 좋지만 위험합니다. 반대로 경상수지 흑자는 나쁘지만 바람직하기도 합니다. 모든게 ‘정도’의 문제인데, 그것도 과연 어느 정도가 좋으냐 나쁘냐를 판단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심지어 개인의 가치관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다만 특정 국가의 경상수지가 흑자인 것은 그 나라에 돈을 ‘빌려준’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좋은 현상입니다. 그래서 국가별 경상수지는 중요하게 쓰이는 통계입니다. 그러나 어떤 나라에 ‘투자’하는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그 나라 경상수지가 흑자인 것이 반드시 좋은 뉴스는 아닙니다.
경상수지 뿐 아니라 그 어떤 경제현상이든 그 자체로 나쁘거나 좋지는 않으며 그 현상의 결과도 나쁘거나 또는 좋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나쁨이 좋음을 잉태하고 좋음이 나쁨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뭔가를 좋다 또는 나쁘다로 규정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게 오늘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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